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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녘추억] 국군포로 아들 사랑으로 감싼 선생님
 닉네임 : nkchosun  2002-05-17 09:51:00   조회: 3823   
서영석

두만강을 건너며 언제 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 아쉬움과 눈물로 고향을 떠났다. 내 고향은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이다. 온천이 좋기로 소문이 나서 북한 전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온천욕을 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학교 뒷산 밤나무에 올라가 지팡이로 덜 익은 밤을 두들겨 따 구워먹으려다가 경비원 아저씨에게 들켜 걸음아 날 살려라 정신없이 줄행랑을 놓던 때가 엊그제 같다.

고향은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곳이겠지만, 그곳에서의 고등중학교(남한의 중고교를 합친것) 시절은 참 그립다. 5학년 때, 스물셋의 여자 국어선생님이 부임해 오셨다. 웃는 모습이 너무 예뻐 우리 반 남학생들로부터 굉장한 인기를 모으셨다.

국어선생님이 학교로 오신 다음부터 지각생이 모범생으로 변하는 이상한 일들이 생겨났고, 다른 수업은 안 들어도 국어수업만큼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재미있게 들었다. 선생님은 명절이 되면 꼭 우리를 집으로 초대해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주셨고 인생의 진로에 대해 많은 조언을 해주셨다.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사범대학에 가게 돼 통지서를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내가 졸업하던 해 우리 학교는 함경북도 고교 축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공격수였던 나는 덕분에 김정숙사범대학 체육교육과에 특별전형으로 뽑힐 수 있게 됐다. 드디어 사범대학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됐다. 그러나 그것은 낙방 소식이었다. 나를 스카우트했던 사범대학 체육과장을 찾아가 이유를 물었다. 그 교수는 『네 아버지가 국군포로라는 걸 내가 몰랐다. 미안하다』고 했다.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그때까지 출신성분을 따지는 계급사회의 현실을 너무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좌절하고 방황하던 내게 손을 내밀어 주신 분은 바로 국어선생님이었다. 내 손을 이끌고 김책(옛 성진)시에 있는 체육대학까지 가서 학장을 직접 만났다. 선생님은 이 아이는 축구를 잘하는데 사정이 여차저차해서 사범대학에 못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다행히 이 학교는 출신성분을 그다지 따지지 않았다. 이미 개학이 된 시점이었지만 기량 테스트를 받고 입학할 수 있었다.

식량난으로 입학 후에도 대학기숙사에 쌀이 떨어져 학생들이 세 끼를 다 먹을 수 없었다. 선생님은 두세 달에 한 번씩은 찾아와 장마당에 데려가서 먹을 것을 사주시고 격려해 주셨다. 선생님의 그때 그 모습, 그 말씀을 잊을 수가 없다.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한평생 아버지 신분을 원망하며 좌절한 채 살아갔을 나는 결국 체육대학을 졸업하고 인민학교에서 체육을 가르치는 교사가 될 수 있었다.

사랑과 믿음으로 우리를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통일되는 날 제일 먼저 선생님을 찾아뵙고 큰절을 올리렵니다.
/99년 탈북·고려대 컴퓨터교육과 재학
2002-05-17 09:51:00
203.xxx.xxx.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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