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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녘추억] 유명 영화작가의 말 한마디
 닉네임 : nkchosun  2002-03-18 16:51:00   조회: 3145   

유지성
/평양음악무용대학 졸업·99년 탈북

90년대 들어 평양에서는 친척 중에 외국에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첫 당부가 "제발 달아나지 말라"는 것이었다. 고위층에서는 가족이나 친척이 외국에 나갈 기회가 생겨도 탈북을 우려해 외국행을 막는 경우까지 있었다. 해외 출장자나 유학생들에 대한 북한 당국의 선정 기준도 까다로워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부부가 함께 나가는 경우에는 아이들 중 한 명은 ‘인질’로 남겨 놓고 가야 했다.

연좌제의 고통에 시달렸던 음악대학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새롭다. 언제나 밝고 친어머니처럼, 친누나처럼 학생들에게 다정했던 여선생님이었다. 그런 분이 언젠가부터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침통한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사연인즉 인민군 소속 4·25예술영화촬영소 작가로 있던 동생이 ‘반혁명분자’로 몰려 지방으로 추방됐기 때문이었다.

동생은 시나리오 작가 이진우로 북한 영화계에서는 잘 알려진 재능있는 작가였다. 영화계 일각에서는 북한을 대표하는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작가 이춘구보다 이진우가 영화적 언어 구사에는 훨씬 강하다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영화 ‘이름없는 영웅들’ ‘월미도’ ‘붉은 단풍잎’ 등 북한 내에서는 명작으로 분류되는 영화에 작가 이진우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런 그에게 예술영화 ‘의용군 처녀들’이라는 시나리오를 쓰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군인보다는 여성으로서의 그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린 이 영화가 최고지도자의 비위를 거슬렀던 것 같다. 작품을 완전히 새로 구성해서야 빛을 볼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이진우는 사상 비판의 대상이 됐다.

좀더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조소(朝蘇)합작영화 제작에 참여하면서였다. 소련의 연출가 한 사람이 “당신네 나라 영화는 왜 남녀묘사에 그토록 경직되어 있는가?”라고 묻자 “당신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는 창작의 자유스러운 환경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고 대답한 것이 국가안전보위부에 적발되면서 그와 가족의 불행이 시작된 것이다.

당국은 그를 반혁명분자로 몰아붙였고 당사자는 물론 일가친척까지 정치범수용소로 끌고갔다. 나의 선생님은 다행이 빠질 수 있었는데 듣기로는 남편이 캐나다에 거주하는 유력한 친북인사의 친척이라는 것이 이유였다고 한다.

선생님은 눈물을 글썽이며 우리에게 말했다.

“난 남북관계가 경직되기를 바라지 않아. 그러면 동생과 가족들이 수용소에서 영원히 나올 수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남북관계가 풀리면 동생이 많은 일을 했던 것이 평가를 받게 돼 용서를 받지 않을까 싶어.”

가족 하나하나를 숙명적으로 묶어 체제를 유지하려는 발상은, 거꾸로 체제를 더욱 유지되기 어려운, 급기야 가족 간의 정까지 끊어야 하는 막된 세상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2002-03-18 16:51:00
203.xxx.xxx.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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