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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녘추억] 친구·이웃 도움으로 견딘 시간들
 닉네임 : nkchosun  2002-02-25 10:46:00   조회: 2320   

김군일

북에서 살 때 나는 친구들과 이웃들로부터 너무도 많은 도움을 입고 살았다. 어쩌면 그 어렵고 고통스럽던 나날을 이겨낸 것은 모두 그들이 내게 베풀어준 따뜻한 정 때문일 것이다. 많은 원한을 안고 북한 땅을 떠났지만 아직도 그 땅을 그리워하는 이유도 아마 그 정 때문이 아닐까 싶다.

95년과 96년은 내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해였다. 95년은 마지막 남은 살던 집마저 북한돈 2000원에 팔아야 할 만큼 식량난이 절정에 달한 해였고, 96년은 그 고난에 지쳐 끝내 나의 아버지가 굶어서 돌아가신 해였다.

아버지는 96년 4월 21일 돌아가셨다. 당시 나는 고등중학교 5학년이었지만 식량난으로 학교를 나가지 못한 지 한 학기가 돼가고 있었고 사실상 학교를 포기한 상태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장례식을 치러야 했지만 굶어서 죽은 사람의 집에 장례식을 치를 경제적인 능력이 있을 리 만무했다. 다행히 인민반장이 동사무소에 사망신고를 해서 약 30kg의 밀가루를 배급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해서 받은 밀가루를 팔아 3일간의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렀다.

아버지 영전에 살아 계셨을 때에는 대접하지 못했던 음식들을 차려놓고 장례식을 치르는 그 현실이 야속하고 저주스러웠지만 그것은 우리 가족만의 현실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북한의 모순된 현실을 보여주는 한 단면에 불과했다.

장례식 이틀째 되던 날, 아버지의 영전 앞에 머리를 숙이고 앉아있는 내 곁에 같은 반 친구들이 몰려왔다. 나는 학교에 등교하지 못한 지도 오래 되었고, 그래서 계속 피해 다니기만 했던 학급 친구들이었는데 그들이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자기들끼리 돈을 모아 소주 몇 병과 얼마간의 음식을 마련해 찾아온 것이었다.

친구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하루에 한 끼도 변변히 먹지 못하는 어려운 상황인줄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찾아와 주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너무도 반갑고 고마워 눈물이 쏟아졌다. 친구들은 나를 에워싸고 한 명씩 내 손을 잡아주면서 "그동안 모르고 있어서 정말 미안하다"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장례식이 끝나고 며칠 후 친구들의 정성이 고마워서 학교에 갔을 때 "기운 내라"고 하면서 내 손을 꼭 잡아주시던 담임선생님과 급우들의 그 따뜻한 눈빛들이 눈에 선하다.

나는 북한에서 삶을 그렇게 견디어냈다. 학교 다닐 때는 누구보다 가난했던 탓에 늘 도시락을 못 싸 가지고 다녔지만 그때마다 학급친구들이 자기들의 점심을 나누어 주곤 했다. 선생님과 또 많은 이웃들도 그렇게 나를 아껴주었고 나는 늘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기만 했다.

그러나 이제는 처지가 바뀌어 내가 그들을 도울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나를 위해 자기들의 밥그릇을 나누어 주었듯이 이제 나도 그들을 위해 내 밥그릇을 나누어주고 싶다. /80년 함북 무산 출생. 99년 입국. 협성대 신학과 재학.
2002-02-25 10:46:00
203.xxx.xxx.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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