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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녘추억] 버드나무 위 참새가 잠깨우던 어린시절
 닉네임 : nkchosun  2002-01-13 23:05:00   조회: 1604   

김승철

인구 1000만이 넘는 대도시 서울에서 살면서 느끼는 것은 주변의 모든 것이 무기질적이라는 것이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의 딱딱한 도시를 느낄 때면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북한을 떠나기 전까지 근 30여년을 살았던 함흥의 우리집은 동남쪽으로 창문이 나있어 항상 햇볕이 따스하게 비쳐들었다. 아파트 앞뒤로 보이는 나무라곤 버드나무 뿐이였다. 아파트앞에 마을의 아버지들이 힘을 모아 만들어 놓은 놀이터에는 키 큰 버드나무가 여기저기 서 있었다. 아파트 뒷켠 도랑옆 경공업전문학교 울타리 안과 밖에도 4층짜리 아파트 키를 훌쩍 넘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죽 늘어섰다.

동이 터오는 새벽을 맨 먼저 맞는 사람은 집안에서는 내 어머니셨지만 밖에서는 버드나무 위에서 잠자던 참새무리였던 것 같다. 청청하고 싱그러운 참새 울음소리에 이따금 까치소리까지 가세해 조화롭고 맑은 음향을 내며 나를 깨우곤 했다.

버드나무는 사시사철 낮밤없이 우리와 함께 있었다. 낮이면 진(진)놀이(진을 치고 노는 놀이)의 진터가 되고 밤이면 숨박꼭질에 더 없는 친구가 되었다. 숨는다는 것이 버드나무 위에 올라갔다 떨어질뻔한 일도 있었다. 버들강아지는 봄의 전령사였고 생명력 넘치는 기운을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한여름에는 뙤약볕을 가려주는 버드나무 밑에서 딱지치기와 땅따먹기도 했고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기도 했었다.

적어도 인민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렇게 정신없이 놀았다. 날이 저물면 아파트의 창문들이 일제히 열리며 우리를 부르는 어머니들의 목소리가 어김없이 들려왔다.

아쉽게도 여기저기 더 많은 아파트가 속속 들어서면서 버드나무는 점차 베어져 없어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아예 몇그루 남지 않았다. 그래도 북한을 떠나기 전날 새벽에도 아파트 뒷켠의 버드나무에서는 아침을 깨우는 참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내가 참새 소리에 잠을 깬 것은 그날이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이곳 서울에서도 참새구경은 힘들다. 생활은 현대화되었지만 자연과는 더 멀어진 것이다. 탁한 공기와 밤이고 낮이고 잠들지 않는 소음, 사방을 가로막는 아파트들에 위압되면 싱그러운 자연의 숨결을 느끼고 싶어진다. 그래서 이따금씩 고향의 참새와 버드나무를 생각하게 된다.

지금 북한에서 크고 있는 아이들은 이나마의 추억도 가질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내 어린시절에도 배가 고팠지만 지금 아이들의 배고픔과는 비교되지 않을 성 싶다. 생각을 이어가노라니 두고 온 아들 생각에 가슴 깊은 곳에서 아픔이 배어나온다. 아버지의 어린시절처럼 포근하고 부드러운 추억은 없을지언정 제발 희망만은 잃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94년 탈북, 북한연구소 연구위원.
2002-01-13 23:05:00
203.xxx.xxx.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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